문화

라디오헤드가 '크립'을 부르지 않는 이유

햄보께 2017. 4. 24. 23:38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밴드인 라디오헤드. 지금의 라디오헤드를 만든 곡이라고 한다면 데뷔 앨범의 '크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불안한 청춘들로 대표되던 이 곡은 20여 년이 넘은 지금에도 라디오헤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입니다. 그런데 1998년 라디오헤드의 맴버들은 '크립'을 부르지 않기로 합니다. 도데체 '크립'에 어떤 사연이 있길래 맴버들은 이 곡을 부르지 않기로 결정한 걸까요?





한 공립학교의 스쿨밴드 <온어프라이데이>로 시작해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밴드가 된 라디오헤드는 '롤링스톤'지가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 중 하나로 꼽히며 전 세계 3천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한 밴드. 수많은 히트곡들이 있지만, 역시 라디오헤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은 '크립'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크립'은 보컬 '톰 요크'가 만든 곡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을 흉물이라 칭하는 자조적인 가사와 우울하고 몽환적인 멜로디가 사람들을 사로잡아 라디오헤드를 세계적인 밴드로 만들어준 곡 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라디오헤드의 공연에서 '크립'을 거의 들을 수 없게 됩니다. 1998년 이후 라디오헤드가 공연에서 '크립'을 부른 것은 10여 년 동안 단 10회 정도에 불과할 정도. 특히 2009년 이후에는 7년 동안 한 번도 부르지 않다가 2016년 새 앨범 발매을 기념한 공연에서만 '크립'을 연주했습니다.


라디오헤드가 '크립'을 부르지 않는 이유

2014년 한 잡지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라디오헤드는 "왜 '크립'을 부르지 않느냐"는 관객의 질문에 "싫증이 나서 그랬다"라고 답변하면서 화제가 됩니다. 사실 이전부터 팬들 사이에서는 라디오헤드가 '크립'을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죠.


실제 라디오헤드 맴버들은 데뷔 전부터 '크립'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결성후 7년 동안 긴 무명시절을 보냈던 멤버들은 음반제작자 '션 슬레이드'와 싱글앨범을 준비하던 중 서로 극심한 의견 대립을 겪게 되었습니다. 제작자인 '션 슬레이드'는 '크립'을 첫 싱글곡으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라디오헤드 멤버들은 이 의견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멤버들은 곡이 너무 우울하기도 하거니와 평소에 자신들이 해오던 음악 색깔과 좀 다르기 때문이라고 반대했지만, 결국 제작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후 '크립'을 녹음 하는 과정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조니 그린우드'가 중간부터 오버드라이브 사운드를 추가해 불만을 표출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아주 유명한 일화이죠. 코러스 직전에 '조니 그린우드'가 넣은 뮤트 사운드가 그것입니다. 


라디오헤드의 첫 싱글은 맴버들의 우려대로 영국싱글차트 78위에 머무르며 앨범또한 단 6천 장 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 년 후 갑자기 해외에서 공연 요청이 쇄도하게 됩니다. 우연히 이스라엘의 한 라디오프로그램에 방송된 '크립'이 입소문을 통해 미국에 알려지고 이후 빌보드 차트 34위에 랭크되며 '크립'은 전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부터 였습니다. 1995년 '페이크 플라스틱 트리'를 대표로 하는 라디오헤드의 두 번째 앨범이 평론가들에게 역대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며 극찬을 받게 되는데요. 불행히도 공연을 찾는 관객들은 라디오헤드의 다른곡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크립'만을 원합니다. 심지어 '크립'을 듣고난 후에는 다른 노래는 듣지 않고 공연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관객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새앨범에 대한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새 앨범에 대한 질문보다는, '크립'과 비슷한 색깔의 음악이 있는지 질문을 한다거나 '크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느냐는 등 온통 '크립'에 관련된 질문이 대부분 이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크립' 한곡에만 쏠리는 지나친 관심에 부담을 느낀 멤버들은, 자신들이 <원 히트 원더>로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멤버들은 공연에서 '크립'을 부르지 않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실제로 1998년 이후 공연 리스트에서 '크립'은 완전히 모습을 감췄고 이따금씩 즉흥적으로 부른 것 외에는 공연에서 '크립'을 연주하는 라디오헤드를 보기 힘들어 졌습니다. 2012년 한국의 첫 내한 공연이었던 지산 락 페스티벌에서도 '크립'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밖에도 라디오헤드는 '크립'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 조건에서만 인터뷰에 응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을 스타로 만들어준 '크립'을 오히려 부르지 않기로 결정한 라디오헤드. 일부 평론가들은 "현재의 라디오헤드는 그들이 '크립'을 포기했기 때문이다"라고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이런 입장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공연에서 '크립'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무척 아쉬워 하고 있습니다.